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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마음챙김)이란 무엇인가? 붓다의 뒤를 잇는 위대한 인물 오쇼의 명상 강의

Colson_Kim 2023. 9. 18.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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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One big thing):

오해하고 있던 명상(마음챙김)의 의미를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일상 속에서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누가 읽으면 좋은 책일까?(Why it matters?)

명상하는 순간이 다가 아니라 일상이 명상이 되어 마음에 휩쓸리지 않길 바라시는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더 읽어볼까요?(Go deeper?)

당신의 시간은 소중합니다. 목적에 맞지 않는 포스팅이라 생각하시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내용(Details)

1. 명상은 주시다.

1) 싸우면 이길 수 없다.

자신의 생각들, 온갖 세뇌들에 맞서 싸우기보다 그저 순수한 주시자가 되어야 한다. 싸우면 이길 수 없다. 싸우지 말아야 승리를 얻는 것이다. 승리는 주시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주시에는 무심이 필요하다. 생각들이 혼재하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없고 다른 걸 보게 된다. 생각들이 허락하는 것을 바라보게 된다. 

 

지식은 모두 쓰레기이다. 무지의 상태로 살아가라. 그 상태로부터 시작하라. 어린아이처럼 나무들을 바라보고, 시인처럼 달을 바라보라. 그리고 광인처럼 드넓은 창공을 올려다보라.

 

혈액이 두뇌로 향해 가도록 누가 통제하는가? 정해진 양의 산소만 두뇌로 가도록 통제하는 것은 과연 누구인가? 분명히 자신은 통제의 주체가 아니다. 내 눈에는 그 어떤 통제자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우선 마음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초월하는 첫 단계이다. 마음을 적이 아니라 벗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명상은 마음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초월한다는 점이다.

 

마음과 싸우는 싸움군이 되지 말아야 한다. 싸우면 마음이 한동안 잠잠해지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승리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마음을 필요로 할 것이고, 마음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마음이 없이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마음이 없이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오직 사랑만이 길이다.

 

2) 주시는 비동일시다.

주시는 비동일시다. 마음은 주시자가 될 수 없다. 마음은 주시자가 아니라 주시의 대상이 되고 관찰자가 아니라 관찰의 대상이 된다. 자신의 온갖 생각, 욕망, 환상, 기억, 꿈들이 오가는 것을 그저 바라본다.

 

그럼 바라보는 자는 누구인가? 바로 가슴이다. 가슴은 우리의 진정한 자아, 우리의 본질적인 자아의 거처이다. 가슴에서 우리는 사랑, 자비, 연민, 용서와 같은 감정을 느낀다. 가슴에서 우리는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경험한다. 따라서 가슴과 주시는 서로 다른 게 아니다. 주시하면, 가슴에 중심을 잡게 된다.

 

2. 명상은 완전한 자각이다

1) 명상은 망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욱 또렷하게 기억하는 게 관건이다. 

마음챙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각'이다. 완전히 깨어있는 자각이다.

 

명상은 자신을 망각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욱 또렷하게 기억하는 게 관건이다. 에고란 무엇인가? 자신을 망각하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에고가 존재하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실체를 알지 못할 경우, 가짜 대체품을 만들어야 한다. 

 

에고는 진정한 자아에 대해 만들어놓은 가짜의 대체품이다. 하지만 이름이나 호칭처럼 실체가 아니다. 그것을 떨쳐버릴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이 '나'가 왜 그토록 중요하고 중심적이고 실재적인 것이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그림자가 왜 그토록 중요한 실체가 되었는가? 자신의 진짜 자기를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빛이 등장하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진짜 자아를 기억하면 가짜 자아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 그래서 가짜 자아를 떨쳐버려야 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에고는 모든 상황에 존재한다. 에고는 자신에게 자양분을 주고 강해지기 위해서 그 어떤 상황도 결코 놓치지 않는다. 에고를 주시하되 그것에게 자양분을 주지 말라.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에고는 굶주려서 죽게 된다. 에고에게 먹을 것을 그만 주어라. 그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두 번째, 더 깊게 자각하라. 걸어갈 때 깨어있는 자각으로 걸어라. 들을 때 완전한 자각으로 들어라. 비몽사몽의 그저 그런 미적지근한 상태로는 안 된다. 말을 할 때 자각을 갖고 말하라. 무얼 하던지 간에 삶 전체가 자각으로 물들게 하라. 그러면 점차 자각이 진정한 자아에 대한 비전을 안겨줄 것이다. 

 

2) 어리석음과 진정한 지성

어리석음은 일종의 깊은 잠, 깊은 부주의이다. 우리는 이유도 모른 채 뭔가를 계속 행한다.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온갖 상황에 연관된다. 깊은 잠에 빠져든 채로 삶을 살아간다. 깊은 잠에 빠져든 그런 상태가 바로 어리석음이다. 마음과 동일시되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우리가 기억한다면, 지각이 생겨서 정체성이 마음과 함께 사라진다면, 더 이상 마음이 아니라면, 마음을 초월했다고 느낀다면, 그때야 비로소 진정한 지성이 생겨난다. 지성은 일종의 꺠우침이다. 잠이 든 상태에서는 어리석다. 깨어있을 때 어리석음은 사라진다. 그때 처음으로 지성이 생겨난다. 

 

현재에 따라 행동하라. 준비 없는 상태로 행동하라. 현재의 자각으로부터 행동하라. 과거로부터 행동하지 마라. 그러면 어리석지 않을 것이다. 마음은 오직 과거에 존재한다. 마음은 축척된 과거다. 과거에 알고 있던 모든 것이 바로 마음에 담겨 있다. 삶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지만 마음은 늘 똑같이 머물며 죽은 기억들, 죽은 정보를 갖고 있다. 매 순간 맥락이 바뀌고 질문이 바뀐다. 그런데 정해진 답변들만 들고 있다. 그러면 늘 문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어리석은 마음은 늘 문제에 빠지고 고통을 겪는다. 다른 게 아니라 단지 이런 이유, 즉 너무 많은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반항적으로 보인다. 그는 가짜 답변, 고정된 답변을 주지 않는다. 그는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길을 걸어간다. 그는 자기 스스로 길을 만든다. 지성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따른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를 추종하지 않는다. 지성은 자신의 길을 만들어간다. 어리석은 사람들만 타인을 추종한다.

 

누군가를 따르는 건 가장 간단하고 덜 위험하고 더 안전해 보인다. 늘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 던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전한 길을 선택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을 택한 것이다. 삶을 택한 게 아니다. 삶은 위험하고 무모하다. 깨어있는 진정한 지성은 어떤 대가나 위험이 있더라도 언제나 삶을 선택한다. 그것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3) 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두려울까?

모든 사람이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모두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걸 두려워한다. 이것이 바로 과거에 인류가 모든 어린아이들, 모든 인간을 세뇌시킨 방식이다.

 

그 전략은 매우 간단하면서도 위험하다. 그 전략은 당신을 비난하고 이상형을 심어주어서 늘 '어떤'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게 만든다. 기독교인은 예수가 되려고 애쓰고, 불교도는 붓다가 되려고 애쓴다. 당신을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놓는 것은 매우 영리한 방법처럼 보여서 그렇게 해왔던 사람들은 분명히 자기 자신을 모를 것이다.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데에는 한 가지 사실, 즉 자신은 쓸모없고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무의미한 존재라는 사실에 완전히 세뇌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물론 타인에 의해 부여된 규칙과 과정을 따르기만 한다면 존경과 권위라는 가치를 얻게 될 수도 있다. 위선자가 될 수만 있다면 사회의 존경받는 시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진정성 있고 정직한 자신이 되고자 한다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비난을 받으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대는 나에게 묻는다. "왜 저는 있는 그대로의 저를 받아들이는 게 두려운 걸까요?" 다른 사람이 그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대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거부당할 거라는 두려움과 평가를 심어두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모든 사회와 문화가 심어둔 절대적인 세뇌다. 그대가 자신은 받아들이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거부되거나, 그대가 자신을 거부하고 사회와 문화로부터 존경과 명예를 얻는 것 중에 하나이다. 그 선택은 매우 어렵다.

 

분명히 절대 다수는 존경심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존경심을 선택하는 동시에 온갖 고민, 고뇌, 무력감, 사막처럼 척박한 불모지의 삶, 어딜 가더라도 오아시스조차 찾을 수 없는 그런 황량한 삶이 따라온다. 

 

3. 명상은 무위다

명상은 마음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부재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마음이 멈출 때 명상이 일어난다. 그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마음을 초월하는 일이다. 주의를 기울이면 마음은 멈춘다. 

 

집중은 명상이 아니다. 묵상도 명상이 아니다. 어떤 단계에서도 육체적, 심리적으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 모든 행위가 멈추고 그저 존재할 때,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무위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어도 무얼 해야 할지 그 방법을 말해줄 수 없다. 왜냐하면 행위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될 거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바로 그런 이해를 통해서 무위가 일어난다.

 

무의는 하나의 해프닝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그것을 했다. 나는 그것을 성취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단지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그것이 일어났다. 나는 늘 존재해 왔기 때문에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묻지 말라.

 

4. 명상은 완전한 이완이다.

긴장은 곧 서두름, 두려운, 의구심을 뜻한다. 긴장은 늘 안전하고 안정된 상태를 보장하려는 끝없는 노력을 의미한다. 긴장은 내일을 준비하고 사후의 삶을 준비한다는 뜻이다. 긴장은 진정으로 살아보지 못하고 그저 스쳐 지나간 과거를 의미한다. 

 

이완은 육체부터 시작해서 마음, 가슴으로 나아간다. 가슴을 초월하면 자기 존재의 가장 핵심에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자기 존재도 이완할 수 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아주 느리게 걸어라. 발걸음마다 깨어있는 의식을 갖고 내딛어라.'라고 말하고 했다. 모든 발걸음을 의식적으로 내딛으면 느리게 걷게 된다. 서둘러서 달려가면 망각하고 만다. 따라서 붓다는 매우 느리게 걷는 법을 가르친다.

 

매우 느리게 걷다 보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새로운 자각이 육체 안에서 생겨난다. 음식도 느리게 먹다 보면 깊은 이완이 생겨나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느리게 행하라. 과거의 낡은 방식과 습관을 바꾸고 거기에서 벗어나라. 

 

💡느낀점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패턴화된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담 시간 외에도 그 사실을 자각하면서 고쳐보고자 했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 

 

자아 초월에 대한 개념에 관심이 생겨서 오쇼의 자아초월을 접하게 되었고 책 내용에 감명을 받아 오쇼의 다른 책인 '마음챙김이란 무엇인가'도 읽어봤다. 일상에서 주시와 자각을 실현하기 위한 오쇼의 명상 강의라 하니 나의 고민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을 것만 같았다.

 

오쇼가 말하는 해답은 '현존하는 삶'의 실천이다. 우리는 깊은 잠에 빠진 마음상태로 그저 기계적으로 행하며 살아간다. '마음'은 바로 '내가 부재한 상태'이다. 내가 현재에 존재하는 순간, 마음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전에는 명상을 나의 목표를 달성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한 자기계발의 하나로만 봐왔다. 목표에 부합하는 건설적인 행동은 받아들이고 그에 반하는 충동적인 행동을 다스리기 위한 방편으로 명상을 해오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건 명상이 아니라 '집중'에 가까웠다. 오쇼의 말대로라면 사회가 '어떤'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게 만든 이상향, 즉 가짜 자아를 쫓는 행위 었다. 나의 패턴화된 삶도 마찬가지로 타인의 인정과 존경을 받고자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한 발버둥에서 비롯됐다. 그렇다 보니 항상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현존하는 삶과는 아주 먼 삶을 살아왔다. 

 

패턴화된 삶에서 벗어나 현존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사실 많이 두렵다. 용기가 나질 않는다. 현존하는 삶을 실천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미래보단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한량 같은 모습이 떠올랐고 세속에서 벗어난 낙오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현재의 만족하는 삶이 정말 의미 있는 삶인지 자꾸만 의구심이 든다.

 

하지만 내 삶이 과거와 미래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고 긴장의 연속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이러한 긴장을 이완시키고 현존하는 삶을 실천하는 게 삶의 균형을 되찾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가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 같다. 조용히 앉아서 명상하는 시간도 필요하겠지만 일상생활에서 느리게 걷고, 느리게 먹는 연습부터 차근차근 해나가봐야겠다. 

 

 

젠토피아 마음챙김이란 무엇인가 (지혜의 연금술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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